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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힘의 진실

1# 당신인가요?

날 찾은 게 당신이어서 정말 기뻐요.

이 훔친 눈으로 수많은 공포를 예견해 왔지만, 미래를 알게 되어 고통스러운 지금은 아주 작은 희망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네요.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사람이 당신인가요? 당신이 틀림없겠죠, 수호자님. 달리 누가 날 찾겠어요? 아이코라는 숨겨진 자들이 필요할 때 돌아오리라 믿고 있어요. 케이드는 날 보고 싶어했다고 인정할 바엔 차라리 눈 딱 감고 폭포에 뛰어들겠지만 말예요. 자발라는 나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죠.

날 찾아줄 사람은 수호자님밖에 없어요.

수호자님이 날 구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난 이미 말라 비틀어진 송장이나 죽어 버린 고스트도 아니었고, 당신이 도와 주기 전에 죽을 게 확실했던 통신 장치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도 아니었거든요. 죽을 힘을 다해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왔어요. 내 힘으로 탑까지 돌아왔다구요. 복수할 생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당신을 군체에게 던져줘 버린 게 아니에요. 당신의 승리를 누구보다도 기뻐한 건 나라구요.

묻고 싶은 게 많겠죠. 내가 여왕과 뭘 계획했는지, 오릭스가 죽은 후 내가 어떤 운명을 받아들였는지, 이 도시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찬란했던 꿈이 악몽으로 바뀌었는지 말이죠. 오릭스를 없애는 길을 안내했던 것처럼 이 저주를 푸는 방법도 알려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군체의 비밀 세계에서처럼 꿈의 도시에서도 행동과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똑같죠.

내 대답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단 나를 이해해야겠죠.

군체에게 빛과 고스트를 빼앗긴 나는 각성자 여왕과 공모해 군체의 왕인 오릭스와 그의 아들 크로타를 처치하고 마라 여왕을 우주 위원회 위원으로 앉히기로 했죠. 그래서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탑으로 달아났던 거예요. 군체의 마법 속에 깊이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려는 모든 이를 부르는 비명의 바다 속으로 말이에요.

별자리가 딱 맞을 때만 여왕의 선물 속에 이 편지를 살짝 넣어둘 수가 있어요. 제 다음 편지를 기다리셔야 해요. 그 편지를 확인해야 진실이 시작되는 곳을 알 수 있답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심으로 저를 신뢰하든 그렇지 않든, 제 얘기가 끝날 때쯤엔 제가 진짜 누구인지 알게 되시리라는 것만은 맹세하죠.

 

전 에리시아 피야토바 흐시엔으로 처음 태어났답니다. 그때의 개인적인 삶이 지금도 확연히 기억나요. 여행자의 어둠 속에서 탈출한 과거의 수호자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죠. 집은 상트페테르부르크였고, 지구 연도로 22세기에 재혼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주 짜증을 잘 내는 장녀였죠. 가족은 일 때문에 자카르타, 캄차카, 라고스 등등 여러 곳에서 살았는데 저는 안 데리고 간 적이 많았죠. 그래서 얼음장 같은 네바 만에서 혼자 수영을 하곤 했어요.

전 수영을 좋아했어요. 특히 차갑고 얕은 네바 만의 맑은 물에서 수영하는 걸 정말 좋아했죠. 그곳의 물은 겨울의 새벽녘처럼 투명하고 깨끗했죠. 거대한 호버크라프트 바지선이 물 위를 미끄러져 가곤 했어요. 러시아는 자동차 산업은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현대적인 수로 건설에는 성공했죠. 어린아이가 생각 없이 말하는 게 이상한가요? 나는 어릴 때 부모님의 소형 지원 드론인 표드르 근처에서 수영을 하곤 했어요. 빠르게 지나가는 호버크래프트가 무서웠거든요. 둥그런 덮개가 날 집어삼켜 건포도처럼 조각낼 것 같아서요. 하지만 커서는 난폭한 무리들과 어울리게 됐죠. 황금기 시대와 함께 찾아온 숨막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저항하는 세력 말이에요. 그러자 아동용 구명조끼와 표드르의 철저한 감시가 귀찮아지더라구요.

심지어 17살에는 잠수복을 입고 다가오는 바지선 덮개 아래로 잠수를 한 적도 있었다니까요. 사실 위험하진 않았을 수도 있어요. 내가 다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바지선은 경로를 바꿨겠죠. 하지만 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고, 실제로도 죽긴 죽었죠. 그 괴물 같은 배가 날 휩쓸고 지나갈 때 난 거세게 돌아가는 프로펠러 아래에서 덜덜 떨면서 뭔가를 느꼈어요. 나중에 '빛'이라는 걸 알게 된 것과 아주 비슷한 걸요. 영웅 심리였을 수도 있겠죠. 죽음에 직면한 존재 자체였을 수도 있고요.

거대하고 신성한 힘에서 살아남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제가 죽은 건 20년도 더 지나서, 겨울에 혼자 수영을 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스톡홀름까지 가려 했을 때였죠. 지옥의 용광로와도 같은 추위가 닥쳐왔거든요. 겨울에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는 건 자살 행위라고 다들 말렸어요.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엄청나게 살을 찌운 후 상어 방지용 수영복을 입은 여자라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하지만 그땐 다들 들떠 있어서 객기를 부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진짜 자살 행위가 아니면 능력을 뽐낼 수가 없었어요. 그걸 후회할 순 없죠. 저는 언젠가는 견뎌내야 할 더 길고 어두우면서도 절묘하게도 잔인한 그 횡단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 고스트가 어린 시절의 결심에 가득 차 있던 자아가 아니라 그 수영하는 여자의 이미지에서 절 부활시킨 것도 우연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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